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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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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개원하자, 북조선로동당은 6월 2일 대책회의를 열고 4월 말에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채택한 북한의 헌법에 근거해 남북한 전체의 통일적인 최고입법기관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 이에 따라 북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은 다음날 총선거 실행을 위한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는 4월 방북에서 체류를 선택한 남쪽 민족전선 대표들도 참석했다.
북한은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에 김구와 김규식 등 남한 지도급 인사들의 참석이 절실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공작원 성시백에게 6월 5일 이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북의 서신이 전달됐다. 이를 전해 받은 김구와 김규식은 주어진 상황이 4월 입북 때와 비교해 많이 변화했고 또 서신만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니 홍명희를 서울로 보내 상의하자는 취지의 회답을 했다. 북에서는 논란 끝에 안전을 이유로 홍명희를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이어진 밀서 교환과정에서 6월 20일 북의 김일성과 김두봉이 보낸 협조 요청 편지에 김구와 김규식은 답장을 보내며 ‘이남에서 단정이 수립되니 이북에서도 단정을 수립하겠다’고 하는 것은 민족분열행위 아니냐며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북은 두 사람이 불참하더라도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2차 협의회는 그들만의 잔치로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북에서 개최됐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7권: 380-385).
제헌국회가 한창 건국헌법을 만들어 가고 있던 시기, 김구와 김규식은 이같이 북과 비밀리에 소통하며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암초가 등장했다.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5차례의 회의 끝에 6월 15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통협) 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독립노동당 당수 유림(柳林)이 입바른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 첫 부분과 끝부분을 떼어내 연결시킨 이미지.
유림은 “양 김 씨를 비롯한 남북협상파를 주동으로 하는 ‘통협’에 독립노동당 계열은 참가하지 않는다”면서 두 김씨의 주석 및 부주석 추대를 반대했다. 유림은 그 이유를 “양 김 씨가 평양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였으니, 그러한 사람들이 협의회 헤게모니를 잡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유림은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서울로 돌아오자 이들을 “공산당 제5열(간첩)”이라 비난하기도 했었다 (손세일, 위의 책: 376-379).
북에서 진행된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가 종결된 직후인 7월 8일 유림은 또다시 김구와 김규식을 맹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자주와 민주를 조건으로 하는 통일운동자이므로 신탁통치와 독재를 주장하는 공산당 영역의 확대를 환영할 의무가 없으며, 협의회를 변질시키거나 파괴하려는 의도를 달게 받아들일 자유가 없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0일, ‘찬탁에 서명한 양 김씨 통협 영도권 없다’). 유림이 뿌린 고춧가루는 치명적이었다.
이즈음 김구는 되는 일이 없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을 반대했으나 UN은 1947년 11월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1947년 12월 발생한 장덕수의 죽음은 그를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 UN 이 감시하는 5.10 선거를 반대하며 추진한 남북협상도 완전히 실패했다. 마침내 제헌의회가 건국헌법을 만드는 동안 추진한 2차 남북협상마저 신탁통치 찬성 세력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며 좌초했다. 김구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당시 김구가 겼었던 좌절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지금까지 비교적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여 왔다. 김구의 순수한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당시의 주어진 조건 즉 남북을 분할 점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희생된 불운한 결과일 뿐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외세를 등에 업은 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해 김구는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아픔이었다는 동정론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 해석은 최근 발견된 결정적 사료 하나를 근거로 한다. A4 용지 두 장 분량의 매우 짧고 단순한 사료지만, 그것이 가진 함의는 무엇보다 폭발적이다. ‘김구·유어만(劉馭萬) 대화 비망록’이다. 이 영문문서는 당시 주한 중국 공사 유어만이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예고 없이 김구의 경교장을 방문해 이승만과 협력할 것을 권유한 장개석 총통의 뜻을 전하면서 평양 방문에 관해 두 사람이 나눈 대화까지 기록한 ‘극비’ 문서다.
이 문서는 장개석이 김구를 각별히 생각한다는 유어만의 수 인사로 시작해, 김구의 아들 김신과 유어만 자신이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에 남들이 못 하는 듣기 거북한 말조차 나눌 수 있다는 유어만의 친밀감 표현 후, 본론인 장개석의 메시지 즉 이승만 정권에 김구가 협조하면 다음 차례에 기회가 생기지 않겠냐는 조언을 유어만이 김구에게 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구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승만이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정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갈등이 일어나서 차라리 바깥에 있는 것이 낫다는 김구의 해명이 제시된다. 그러나 유어만은 그럴수록 정부에 들어가서 한민당을 견제하는 신익희, 이범석, 지청천을 지원하는 역할을 김구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김구는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힌 자신이 정부에 들어가면 국가건설에 필요한 미국의 원조마저 막힐 수 있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유어만은 이승만도 한때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지적하며 재차 김구를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대화 끝에 김구는 자신의 북한 방문 동기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속내를 드러내는 발언을 한다.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를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입니다.”
놀라운 발언이다. 김구는 북한에 가 봤더니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남침해 남한을 무너뜨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유어만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김구가 북을 떠나며 발표한 공식 성명과 완전히 배치된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 30일 4개 항으로 구성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며 남북협상의 엄청난 성과라고 자화자찬했었다.
성명의 제2항은 “남북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손세일, 위의 책: 276-277). 그렇다면 이 극비 문서는 김구가 ‘순수한 이상주의자’는커녕,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 나아가서 북의 군사적 우위에 투항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여주는 사실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김구는 머지않아 북이 남침할 걸 알고 돌아와서는 대중을 향해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 거짓말을 했다.
이 문서는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보관하고 있다. 유어만은 이 문서를 작성해 대만 본국에 보고하고, 복사본 한 부를 이승만에게도 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이 보관한 이 문서는 경무대를 거쳐 이화장으로 옮겨졌다가, 연세대가 이승만연구원을 설치하면서 ‘이화장 소장 이승만 문서’ 일체를 기증받게 되면서 함께 넘어왔다.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문서를 처음 읽었을 때의 떨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원문 스캔본은 이영훈 교장이 운영하는 ‘이승만학당’ 홈페이지 ‘연구자료’ 버튼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원문 전체를 번역한 한글본은 『월간조선』 2009년 9월호에 실린 조갑제의 글 “‘김구,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실려 있다.
https://www.jayu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