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0
  • 타이쿤
  • 조회 수 95

독립운동가 金九·金奎植(김구·김규식)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金日成(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 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김구·김규식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해 대한민국 建國(건국)을 방해하려 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접경)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시키더라도 언제든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 번 철수하면 한국이 南侵(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6·25 당일 파병을 결심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兩金(양김)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 內戰(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남침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남침의 초대장이었다. 김구·김규식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確言(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류위안 공사가 英文으로 정리해 李承晩 박사에게 전달한 金九와의 대화록.

 
  통일정부 수립에 李承晩 세력을 배제하기로 합의
 
  이 성명서는 또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하기) 諸(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해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근로인민당·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김구·김규식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이승만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김규식이 가담하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김구·김규식은 철저히 이용당했다.
 
  梁東安(양동안) 前(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美蘇共委(미소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 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미소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자명)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김규식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북조선)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 6일)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해 현재 군정에는 부패가 심하다.”
 
  한창 일어서는 북한체제에 대한 두 사람의 호의적 평가도 대한민국 건국 반대의 한 심리적 동기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만 불리한 兩非論
 

金九와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金奎植.

  김구·김규식은 평양에서 돌아온 후인 1948년 5월 6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자찬)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미군정)이 있을 뿐이었다.
 
  두 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됐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악평)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제헌국회가 開院(개원)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말한 데 대해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 7일 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구·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해서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양비론)을 보이기도 했다. 양동안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金九가 걸어간 눈길
 

자신이 애송하는 西山대사의 漢詩를 적은 金九의 휘호.

  이승만 대통령의 養子(양자) 李仁秀(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무력)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 양김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 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 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미아)가 되고 말았다.”(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김)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 성명을 했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건국 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김구는 西山大師(서산대사)의 漢詩(한시)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김구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容共(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했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했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사회가 지금도 김구 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김구-劉馭萬 대화 비망록]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류위완(劉馭萬) 公使(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김구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영문)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김구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全文(전문)을 소개한다.
 
  류위완: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는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해 방문한 것입니다.
 
  김구: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류: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상하이(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김: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류: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장제스(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했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이) 박사(이승만)와 협력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박사와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 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격언)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자초)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金信(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적수)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김: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 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 주실 거죠?
 
 
  李承晩 대통령, 金九 부통령
 
  류: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임무인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김: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류: 내가 이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이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우익)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는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 나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이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나는 反美주의자로 색칠당해”
 

1948년 남북협상 당시 金九와 金日成이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류: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이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申翼熙(신익희)·李範奭(이범석)·李靑天(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박사께서 國益(국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이 박사를 강화시켜 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이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김: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반미)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했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류: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이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악평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 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김: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류: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미국·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김: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공산군에 당할 수 없다”
 
  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김: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류: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해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주권)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기지)가 될 것입니다.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건국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
 
  김구-류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김구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김구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김구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김구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서울주재 중화민국 공사이기도 했던 류위완은 장제스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김구·김규식이 화합,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일행이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왔다. 류위완은 이승만·김규식, 그리고 김구가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점심에 초대했다. 그것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성이 없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을 정도라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정창인).>
 
  류위완은 장제스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주한) 대사 등을 역임한 후 1966년에 별세했다.
 
  김구의 末年(말년) 실수를 무시하고 그를 우상화해서도 안되지만 말년 실수를 과장하여 그의 위대한 生涯(생애)를 부정하는 것은 反(반)역사적이다. 月刊朝鮮에 <이승만과 김구 비교 評傳(평전)>을 쓰고 있는 孫世一(손세일) 전 의원은 “이승만과 김구의 가장 큰 공적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거인 임시정부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끝까지 지켜낸 점”이라고 평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에는 이승만은 대통령, 김구는 경무국장이었고, 1945년에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에는 김구는 정부수반인 主席(주석)이었고 이승만은 駐美(주미)외교위원장이었다.
 
 
  두 사람이 臨政의 자유민주적 정통성 수호
 

1946년 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악수하는 李承晩과 金九.

  이승만과 김구의 反共(반공)주의가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일찍이 레닌이 의도했던 대로, 공산주의자들의 主導(주도) 아래 놓였을 것이라고 손 전 의원은 본다. 이승만은 1920년대에 이미 국가와 기업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독립국가 건설에 장애가 된다는 비판을 하고 있었다. 김구의 공산주의 비판은 이승만의 경우보다 훨씬 감성적인 것이었다. 손 전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같이 공산당을 하자는 李東輝(이동휘·임정 국무총리)의 권유에 대해 김구는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위배하는 행동을 삼가라고 힐책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김구는 모스크바 자금을 임시정부에 내어 놓지 않고 공산당의 활동자금으로 쓰고 있는 전 국무원 비서장 金立(김립)을 부하를 시켜 처단해 버렸다. 그리하여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韓人(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공격목표가 됐다. 김구가 상하이 교민단장으로 활동할 때에는 그들이 民團稅(민단세) 불납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손세일 전 의원은 두 사람의 관계가 독립운동 기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광복 政局(정국)에서도 내내 협조적이었음을 강조한다. 김구는 지방 여행을 하다가 “國父 金九 先生(국부 김구 선생)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고 수행한 鮮于鎭(선우진) 비서에게 “어느 나라에나 국부는 한 사람이야.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 박사뿐이야. 통일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 박사가 되어야 해”라고 말하면서 현수막을 떼라고 했다고 한다. 손세일 전 의원은 이렇게 개탄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김구의 그 겸손과는 관계없이, 또 양쪽의 일부 극성 지지자들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이승만과 김구를 함께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새로 발행되는 10만원 권 지폐에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함께 넣자고 제안한다.”
 
  남한 내 좌익들은 반공투사 김구를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反(반)민족성을 은폐하고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인 이승만 진영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한국의 자유세력이 김구를 대한민국 건국의 敵(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이 음모에 넘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반공 자유민주주의로 못 박고 이를 지켜냄으로써 그 礎石(초석) 위에 자유와 민주의 나라가 선 것이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민족독립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는데 한국은 두 사람 덕분에 예외적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예외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090910005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