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 타이쿤
- 조회 수 93
김구, 김일성 남침 미리 알았나?
1948년 7월 11일, 당시 중화민국 서울주재 총영사였던 류위완이 경교장을 찾아 김구와 회담한 대화록. 자료: 이승만학당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을 주인공으로 흥행돌풍을 이어가고 있는 다큐멘터리영화 '건국전쟁'에는 문제적 장면이 등장한다.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하려던 이승만에 맞서 단정 수립에 반대한 백범 김구와 관련해 이른바 '류위완(劉馭萬) 비망록'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류위완 비망록'은 1948년 7월 11일, 당시 유엔한국위원회 중화민국(자유중국) 측 수석대표이자 서울주재 중화민국 총영사였던 류위완(1897~1966)이 김구의 사저인 경교장을 예방해 김구와 나눈 1시간가량의 대화를 기록한 비망록이다. 앞서 같은해 4월 19일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만나고 온 지 두 달여 뒤에 이뤄진 대화다.
류위완은 1945년 일제의 패망 직후 일본주재 연합군 중화민국 대표로 한성(서울)주재 총영사를 겸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주한 중화민국 외교대표(대사에 해당)이자 유엔 한국위원회 중화민국 수석대표로 이승만·김구 등 당시 남한 사회 요인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나눴다. 이후 주(駐)쿠바 대사를 거쳐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인 1961년 재차 주한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해 박정희 정부 초기인 1964년까지 주한 대사직을 수행했다.
김구, "곧 인민공화국 선포될 것"
한데 류위완이 남긴 이 비망록에는 김구가 말했다는 문제의 발언이 수록돼 있다. "내가 남북 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붉은군대'의 확장을 향후 3년간 중단한다고 해도, 그 사이 남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는 불가능하다. 러시아(소련)인들은 비난받을 새도 없이 손쉽게 남쪽을 급습하는 데, 그것(공산군)을 투입시킬 것이다. 지금 여기(남한)에 어떤 정부가 서고 있지만 곧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다."
김구가 류위완에게 했다는 이 같은 발언은 마치 김일성의 남침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에 김구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하고 초대 내각 참여마저 거부했던 이유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이승만 정권이 와해될 경우를 대비한 사전포석 아니었느냐는 의문이 인다.
당시 류위완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명으로 김구에게 이승만 정권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러 갔다.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과 국공(國共)내전을 벌이며 대치 중이었던 장제스는 소련 스탈린과 중공(中共) 마오쩌둥과 가까운 김일성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적화'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데 장제스가 김구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류위완을 통해 전달한 이승만 정부 참여 권유를 김구가 이 같은 이유를 들어 뿌리친 것. 대화록에 따르면, 당시 류위완은 김구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 김신을 형제와 같이 생각한다"며 "비록 상처가 되더라도 나의 말을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해달라"며 이승만과의 협조를 신신당부한다. 아울러 류위완은 "만약 그(김구)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용의가 있다"는 이승만의 말도 대신 김구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김구는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한다"며 "내가 이미 말했듯, 곧 모든 사람이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며 류위완의 요청을 완곡히 거절했다. 결국 류위완은 김구와 대화를 나눈 뒤 경교장을 나와 이를 영문 대화록으로 작성해 본국의 장제스에게 타전했다. 동시에 같은 대화록의 사본을 이승만에게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승만·김구 결별 계기된 비망록 내용
장제스는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1932)를 기획해 성공한 직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광복군' 창설 등을 도왔다. 1945년 일제의 무조건 항복 직후에는 귀국을 앞둔 김구에게 상당한 액수의 정치자금까지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구의 둘째 아들인 김신 전 공군 참모총장이 쓴 '조국의 하늘을 날다'라는 회고록에는 장제스가 김구에게 건넸다는 20만달러의 정치자금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신 전 총장은 1922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를 나왔고, 김구의 수행비서 격으로 1948년 방북 길을 직접 수행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는 장면 정권에서 공군 참모총장을 거쳐, 박정희 정부 때 주(駐)중화민국 대사와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신 전 총장의 회고에 따르면, 장제스는 광복 후 귀국을 앞둔 김구에게 활동자금으로 쓰라고 약 20만달러를 건넸고, 김구는 이를 현지에 보관해두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김구에게 "외교 활동에 돈이 필요하다. 그 자금을 좀 쓰자"고 부탁했고, 김구 역시 "형님(이승만)이 쓰시라"며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한데 이승만이 1946년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화민국의 당시 수도인 난징(南京)을 들러서 해당 자금을 인출하려 했으나, "김구의 친필문서가 필요하다"고 현지에서 지급을 거절당하면서 김구와 사이가 불편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한 직후 경교장을 나와 오갈 데가 없는 김신 등 유가족에게 서대문의 '금화장'을 거처로 내어준 것도 류위완이다. 김신 전 총장은 "아버지(김구)는 중국(중화민국)과 연락을 취할 일이 있으면 류위완 총영사를 통해 금화장에서 연락을 했다"며 "금화장에서 장제스 총통을 비롯한 중국(중화민국) 측 요인들과 통화를 할 때도 많았다"고 했다.
결국 이승만에게 전달된 '류위완 비망록'이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우파 진영의 양대 지도자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승만과 김구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류위완 비망록은 이승만 대통령의 옛 사저인 '이화장'에 사본이 보관돼 있다.
영화 '건국전쟁'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논픽션 '건국전쟁'(이영석 저·조갑제닷컴) 역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된 뒤 국민회 출신 국회의원들이 김구를 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건의하자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안 돼'라면서 '그는 떠난 사람이야'라고 단정했다"며 "류위완이 보내준 김구와의 대화록을 본 이승만 역시 류위완과 마찬가지로 김구와 단절한 것을 말해준다"고 썼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3/0000041738?sid=102